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단 편집) === 시즌 초반 중심의 운용 방식 === > “내가 SK에 있을 때 우리는 다른 팀보다 훈련을 더 일찍 시작해서 더 오래, 더 많이 했다. 당연히 시즌 초반에 이미 컨디션이 올라와 있었고, 이때부터 치고 나갔다. 그러다가 5월 말에서 6월 초가 되면 힘든 상황을 맞았다. 그동안 주적된 피로 때문에 힘을 못 쓰는 것이다. 거의 한 달 내내 피로가 몰려서 온다." > ---- >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p.66 이 부분은 SK 와이번스 시절부터 본격화된 방식인데, 김성근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강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컨디션을 초반에 빨리 끌어올린 다음, 이를 기반으로 시즌 초반 상대팀을 압살해 기선을 제압하여 선두를 빨리 차지하며 승차 여유분을 확보해놓고 무더위와 장마, 습기로 체력소모가 확 오는 여름에는 1군 주전들을 휴식성 2군이나 벤치를 뎁히거나 간혹 대타로 타격감을 유지시키는 등 휴식을 보장해주는 대신 그 공백을 2군에 콜업한 유망주들로 꾸역꾸역 버티는 방식으로 시즌을 운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시즌 초반부터 압도하는 이 전술은 SK 시절 굉장히 효과적인 전략으로 기능하였다. 시즌 초반부터 압도해버리면 후일 다시 매치업되었을 때 상대방의 위축된 플레이를 끌어낼 수 있고, 시즌 초반부터 저금을 벌어놓은 만큼 몇 경기 지더라도 순위는 뒤집히지 않는다. 이는 선수들의 멘탈 안정을 가져와서 좋은 플레이를 이끌어낼 수 있다. 특히 상위권 진입을 위해서는 몇몇 하위 구단을 조지는 방식이 중요하다. 실제 리그 상위권 혹은 우승까지 노렸던 구단 대부분은 모든 팀을 상대로 좋은 정적을 보였다기보다는, 몇몇 약팀에 대해 압살에 가까운 압도적인 성적을 거둠으로써 성과를 거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초반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면 이런 약팀 찍히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가을야구 다툼을 하는 타 구단도 압도적인 전적을 보여준 SK에 대해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하위 구단을 제압하는 것에 더 주력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동시에 이는 한국의 지역적 특성과 당시 8구단 체제가 맞물려 작용하였는데, 한국은 6-7월이 장마철이라 우천 취소가 잦은 편이다. 따라서 초반 항상 경기가 계속될 때 독주를 하다가 여름의 무더위와 장마로 인한 습기로 지칠 무렵에는 장마시기 우천 취소 등을 이용해 체력을 회복하고 2군 유망주 돌려막기로 버틴 뒤, 시즌 후반에 1군 주전들이 재충전이 완료되어 다시 풀전력을 가동해 압도적인 경기차로 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가을 야구를 지배하는 방식의 운용이 SK의 대표적인 운용 방식이었다. 이는 반대로 시즌 중반 한창 컨디션이 올라왔을 때 비가 와서 개점 휴업하는 상황보다 시즌 전체를 두고 봤을 때 경기력 저하가 덜했는데 문제는 이 것을 가능하게 해준 또 하나의 요인이 8개 구단 체제였다. 당시 SK시절에는 122경기였으나 10개 구단이 되자 144경기로 대폭 늘어나고 일정도 길어진데다가 8구단 체제에 비해 대폭 늘어난 동선거리로 인해 선수들의 피로도 쌓이는 속도도 급격히 늘어나면서 금이 간 것이다.[* 8구단 체제에서는 가장 최악인 케이스가 수도권 경기 후 - 경남권 or 호남권 - 다시 수도권인 케이스였다. 문제는 이 경남권에 NC 다이노스가 창단되고 이후 경기도권에 KT WIZ가 창단되면서 이 최악의 케이스 동선거리 발생빈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바로 다음 팀인 한화 감독 시절에는 독이 되었는데, SK는 전력 자체는 조범현 감독의 육성으로 06년 중위권을 차지한 전력이었고 그런 팀전력을 이어받은 김성근의 윈나우와 김광현, 김강민, 박정권의 잠재력 만개도 있었지만 가장 큰 장점은 이승호처럼 어디든 기용이 가능한 애니콜급 노예라 불리는 불펜자원이 충분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초반에 승리를 엄청 적립해놓고 2군도 나름 구비가 되어있었기에 버틸수 있는 여력이 있었던 팀인 반면 한화는 오랜 암흑기와 너무나도 얇은 뎁스 때문에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따라서 초반 질주를 위한 투자는 팀에 과부하를 더욱 심하게 줄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과부하를 줬음에도 상위권까지 치고 올라올 여력은 없었다. 실제로 2015년 당시 2009년 이후 4월 승률 0.545로 최초 5할 기록, 3위라는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SK 때만큼의 압도함은 없었다.[* 심지어 이때는 운도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 2015와 2016년 모두 개막전부터 끝내기 패배로 마무리지면서 초반 기세가 죽으며 들어갔다. 특히 그나마 여력이 있었던 2015년은 다시 치고 나갔지만, 2016년은 그래도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며 개막 7연패로 이어졌다.] 게다가 2014-2016년은 역대급 폭염과 가뭄 사태가 이어지면서 우천 취소에 따른 회복에도 실패하고 늘어난 동선거리로 지역 이동에 선수단은 더 빠르게 지쳐갔다. 그렇게 뎁스가 얕았던 한화로서는 이 위기를 견딜 힘이 전혀 없었으며 애초에 한화는 성적이 나면 좋지만 최대한 리빌딩 능력을 발휘해 팀을 재건해주기를 바랬는데 뎁스가 얇은 상황에서 윈나우를 뛴게 큰 실책이었다. 결국 이는 한때 마리한화라 불렸던 한화 이글스가 후반기 급격히 추락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